남의 말들

장승욱의 술통 중에서

여진석 2010. 11. 1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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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술을 마시는가?
 
한국의 시인 김춘수(金春洙) 그리고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두 사람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름이 한글로 ‘춘수(한자로는 春洙와 春樹지만)’라는 것, 두 번째는 작품의 바탕에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돌아가시기 전 김춘수(金春洙) 시인을 댁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막 팔순이 된 노시인은 왜 시를 쓰느냐는 내 어리석은 질문에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대답해 주셨다. 하마터면 불경스럽게도 거기에 화답해 “저도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술을 마십니다.”라고 말씀드릴 뻔했다.

 사실이다.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한세상 살아 왔느냐고 묻는다면 “슬픔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생이 무엇인가를 묻던 고등학교 때의 몇 계절을 나는 종로서적에서 지나 보냈다. 수업이 끝난 뒤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그곳에 가서 선 채로 수백 권의 소설과 그보다 훨씬 많은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서정주 식으로 말해 ‘인생의 팔할이 슬픔’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박중식 시인의 시 가운데 ‘슬픈 날은 술퍼, 술푼 날은 슬퍼’라는 절창이 있다. 물론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를 술 마시게 한 것은 정체를 모를 슬픔이었다. 소주잔을 비우고 나면 잔의 안벽을 따라 소주가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의 흐름과는 아주 다른 그것을 나는 술이 가진 ‘슬픔의 농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술은 슬픔이고, 그래서 술을 마시는 일은 세상의 슬픔을 마시는 일이며, 세상의 슬픔과 살을 맞대어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다.  p.60-61


2. 술꾼의 단계 

시인 조지훈은 술꾼을 열여덟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①부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지는 않으나 안 먹는 사람), ②외주(畏酒 : 술을 마시기는 잘 마시지만 술 마시기를 겁내는 사람), ③민주(憫酒 : 술을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지만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이런 식이다. 바둑의 급수를 나누는 것과 마찬가지로 1단계부터 9단계까지는 급(級), 9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는 단(段)을 부여하고 있는데 1단은 애주(愛酒 : 취미로 술을 맛보는 사람)로 주도(酒徒)라고도 한다. 2단은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또는 주객(酒客)…… 6단은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또는 주현(酒賢), 7단은 낙주 (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으로,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또는 주성(酒聖)이라고도 한다. 이 마지막 단계로 음주대학의 졸업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주도 9단은 폐주(廢酒) 또는 열반주(涅槃酒)라고 하는데,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난 사람을 가리킨다. 나를 룸살롱에 입문시키고, 폭탄주의 오묘한 세계를 가르쳐 준, 그리고 스스로는 주도 9단으로 입신(入神)해 열반주를 마시고 홀연히 이승을 떠나간 그 녀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p.323-324
 


 장승욱의 책 <술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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