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들

헤르만 헤세, 나비

여진석 2007. 8. 17. 09:21
728x90

내가 나비를 잡기 시작한 것은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부터이다.

처음엔 큰 관심도 없이 다른 애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보는 정도였다.


 그런데 열 살쯤 된 두 번째 여름에 나는 완전히 이 유희에 빠져서, 이 때문에 다른 일은 전혀 돌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그것을 그만하도록 말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까지 걱정을 하게 되었다.


 나비 잡기에 열중하면 학교의 수업 시간도, 점심도 잊어버리고, 시계탑의 종이 우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를 쉬는 날은 빵 한쪽을 호주머니에 넣고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끼니도 거르면서 뛰어다니곤 하였다.

  지금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면, 이따금 그때의 열정이 몸에 스미는 듯 느껴진다. 그럴 때면 나는 잠시 어린이만이

 느낄 수 있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노랑나비를 찾아냈던 그때의 기분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럴 때면 어린 날의 무수한 순간들이 홀연히 떠오른다. 풀 향기가 코를 찌르는 메마른 벌판의 찌는 듯한

무더운 낮과 정원 속의 서늘한 아침 그리고 신비스런 숲 속의 저녁. 나는 마치 보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포충망을 들고 나비를 노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리따운 나비를 발견하면 - 특별히 진귀한 것이 아니라도 좋았다. 꽃 위에 앉아서 고운 빛깔의 날개를

호흡과 함께 파르르 떨면서 햇볕 아래 졸고 있는 것을 보면 - 그것을 잡는 기쁨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가만가만

 다가섰다.

  반짝이는 반점의 하나하나, 날개 속에 드러난 맥줄의 하나하나가 눈에 뚜렷이 보이면, 그 긴장과 환희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미묘한 기쁨과 거센 욕망의 교차를 그 뒤엔 자주 느낄 수 없었다.

  부모님께서 좋은 도구를 전혀 마련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잡은 나비들을 낡은 헌 종이 상자에 두는 수밖에

없었다. 병마개에서 뽑은 동그란 코르크를 밑바닥에 붙이고 그 위에 핀을 꽂는 것이었다.

  이렇게 초라한 상자 속에다 나의 보물을 간직해야만 했다. 처음 한동안은 이 수집물을 친구에게 즐겨 보여주었지만,

친구들이 가진 도구는 대개 유리 뚜껑이 달린 나무 상자에 푸른빛 거즈를 친 사육 상자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사치스런

것들이므로, 내가 가진 유치한 설비를 더 자랑할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보기 드물고 센세이셔널한 나비가 손에 들어와도 남에게는 비밀로 하고, 내 누이들에게만

이것을 보여주곤 하였다.

 어느 날 나는 우리 고장에서 보기 드문 푸른 날개의 나비를 잡았다. 날개를 펴서 그것을 말린 다음에, 나는 하도 들떠서

 자랑스러워 꼭 이웃집 아이에게만은 보여주리라고 생각했다.

  이웃집 아이란 뜰 건너편 집에 사는 교사의 아들이다. 이 소년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깜찍한 녀석으로, 아이로서는

어딘지 못마땅한 데가 없지도 않았다.

  그의 수집물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게 잘 보존된 점과 섬세한 솜씨는 보석을 간직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나비의 찢긴 날개를 풀로 이어 붙이는, 남이 잘 못하는 어려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모든 점에서

그는 모범적인 소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움을 갖고 있었다.

  이 소년에게 푸른 날개의 나비를 보였더니 그는 무슨 전문가나 되는 듯이 그것을 세세히 보고 나더니, 신기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10페니히짜리 값은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날개를 편 방식이 나쁘다느니, 오른쪽 촉각이 비틀어졌다느니 하며, 제법 그럴 듯한

 결함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러한 결점을 그다지 대단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의 혹평으로 인해 내 푸른 날개의 나비에 대한

기쁨은 물거품처럼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두 번 다시 그에게 수집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태가 지나서 우리는 꽤 머리가 굵은 소년이 되었는데, 그때도 나비잡기에 대한 나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이웃집 에밀이 점박이를 번데기에서 길러냈다는 소문이 퍼졌다. 나는 이 말을 들은 때만큼 흥분한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동무들 중에서는 아직 점박이를 잡은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낡은 책에서 그림으로 보았을 뿐이다. 나비 이름을 알면서도 아직 잡아 보지 못한 것 중에서 나는 점박이를

 어느 것보다도 가지고 싶어하였다. 몇 번이고 나는 책 속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한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무 둥치나 바위에 앉아 있는 이 갈색 나비는 새나 다른 짐승이 자기에게 덤벼들려고 하면

거무스름한 앞날개를 펼치고 아름다운 뒷날개를 드러내 보일 뿐인데, 그 빛나는 커다란 무늬가 매우 이상한 모양이라서, 새는

겁을 먹고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고.......

  에밀이 이 이상한 나비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부터 나의 흥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것을 꼭 한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식사 뒤 틈을 이용해 곧 뜰을 건너서 이웃집 4층으로 올라갔다. 교사의 아들인 에밀은 이 4층에 작으나마 제 방을 하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방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에밀이 없는 모양이었다.

문의 손잡이를 돌려 보니,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어쨌든 실물을 한번 보리라는 생각에 나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에밀이 나비를 보관하는 두 개의 커다란 상자를

집어들었다. 어느 상자에도 점박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물든 날개판에 물려져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과연 생각한 그대로였다. 갈색 비로드 밑날개 양쪽 선이

 있는 양털 같은 털을 바로 곁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무늬만은 보이지 않았다. 종이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나는 유혹에 끌려 종이쪽을 떼어내고, 꽂혀 있는 핀을 뽑았다. 그러자 네 개의 커다란 무늬가 그림에서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게, 훨씬 더 찬란하게 나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것을 본 나는, 이 보배를 내 손에 넣고 싶은, 견딜 수 없는 욕망으로 난생 처음 도둑질을 했다. 나비는 벌써 말라 있어서, 웬만큼

손을 대어도 형체가 일그러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받쳐 들고 에밀의 방을 나왔다. 나는 그때 커다란 만족감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나비를 오른쪽 손에 감추고 층계를 내려섰다. 이때였다. 아래편에서 위로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나는 양심의 눈을 뜨고 말았다. 나는 별안간, 내가 도둑질을 했다는 것과 비겁한 놈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들키면

어쩌나하는 무서운 불안에 사로잡힌 나는 본능적으로 나비를 감추었던 손을 그대로 양복 저고리 주머니 속에다 우겨 박았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떼어 놓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안 될 일을 했다는 부끄러운 생각에 가슴이 싸늘해졌다. 나는 뒤미쳐 올라온

하녀와 어물어물 엇갈리며 층계를 내려왔다. 나는 그때까지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마에 땀이 솟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침착을 잃고

 벌벌 떨며 현관에 우뚝 섰다.

  이 나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될 수만 있다면 그전 상태대로 돌려놓아야겠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괴로웠다.

  그리고 혹시 사람의 눈에 띄지나 않을까, 이 점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날쌔게 발길을 돌려 층계를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1분 후에는

 다시 에밀의 방 가운데 나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나비를 꺼내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다. 나는 그것을 보기 전에 벌써 어떤 불행한 일이 생겼다는 것쯤은 미리 짐작했었다.

그저 울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점박이는 보기 싫게 망가져 주머니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그나마 산산이 부서져서

이제는 이어 붙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

  도둑질을 했다는 생각보다는 그 아름답고 찬란한 나비를 내 손으로 망가뜨렸다는 것이 나로서는 더 괴로운 일이었다. 날개에 있는

갈색 분이 온통 나의 손끝에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완전하게 원형대로 고쳐 놓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간직한 무엇이든지 나는

 기꺼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울한 생각으로 가득 차 집에 돌아온 나는 하루 종일 좁은 뜰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서 모든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놀라움과 슬픔에 잠겨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그리고 나의 고백이 나 자신으로서는 그냥 벌을 받는 일보다 몇 배나 더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도 넉넉히 짐작하시는 눈치였다.

  "너는 지금 곧 에밀에게 가야 한다."
  어머니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에밀을 찾아가서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라. 그것말고는 아무런 길이 없다. 네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로 대신해서 변상해

주겠다고 말해보렴. 그리고 용서를 빌어야지."

  만일 모범 소년인 에밀이 아니고 다른 친구였다면, 나는 용서를 비는 것쯤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나의 고백을 이해해 주거나

 나의 사과를 받아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나는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럭저럭 밤이 되었으나 나는 그때까지도 그를 찾아갈 용기를 얻지 못한 채 주저하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뜰에 있는 것을 보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오늘 중으로 갔다 와야 해. 지금 곧 가렴, 응?"

 

  나는 에밀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만나자 곧 점박이에 관한 말을 꺼냈다. 누가 그랬는지 점박이를 아주 못 쓰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면서,

사람의 소행인지 혹은 고양이가 그랬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였다. 나는 그 나비를 좀 보여 달라고 청했다.

  두 사람은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촛불을 켰다. 못 쓰게 된 그 나비가 날개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에밀이 그 날개를 손질하느라고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그는 부서진 날개를 정성껏 주워 모아서 작은 압지 위에 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본디 모양으로 바로잡힐 가망이 없었다. 촉각도 떨어진 그대로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나의 소행인 것을 밝혔다. 그랬더니 에밀은 격분하지도 나를 큰 소리로 꾸짖지도 않고, 혀를 차며 한동안 나를

지켜 보았다가, 나직한 소리로 말하였다.

  "알았어. 말하자면 너는 그런 자식이란 말이지."

 

  나는 그에게 내 장난감을 모두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도 그는 듣지 않고 냉담하게 도사리고 앉아 여전히 나를 비웃는 눈으로 지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는 내가 수집한 나비의 전부를 주겠다고 하였다.

  "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네가 모은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어. 게다가 오늘은 네가 나비를 다루는 성의가

어떻다는 것을 알 만큼은 알았어."

  그 순간 나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나는 아주 나쁜 놈으로 판정되고 에밀은 천하에 정직한 사람이 되어, 정의를 방패삼아

모멸적인 태도로 내 앞에 버티는 것이었다.

  그는 욕설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다만 나를 바라보면서 경멸할 따름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한 번 저지른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경과를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나에게 키스만을 하고 내버려 두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어머니는 나더러

그만 잠자리에 들라고 하였다. 여느 날보다는 시간이 늦어진 편이기는 하였다.

  그러나 나는 갈색으로 된 두껍고 커다란 종이 상자를 침대위에 올려놓고, 어둠 속에서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든 나비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손끝으로 비벼서 못쓰게 만들어 버렸다.